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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6일 일요일

마태 효과에 대하여…. (마태복음 25장)

마태 효과라고 들어보았는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예수님이 달란트를 맡긴 종에 대한 비유를 설명하는 장면으로,

종교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중국인 친구들도 대부분 아는 개념이라서 좀 생소하기까지 한

그리고, 기독교에 자본주의 속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개념이다.



성경에 언급된 내용을 간단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세 명의 하인들에게 돈을 맡겼다.

A 하인에게는 100달란트를, B 하인에게는 10달란트를, C 하인에게는 1달란드를…

A 하인은 100달란트를 가지고 사업을 하여 큰 돈을 벌었다.

B 하인은 10달란트를 가지고 고리대금으로 돈을 빌려주어 어느정도 돈을 벌었다.

C 하인은 꼴랑 1 달란트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주머니에 들고 있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 A와 B 하인은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고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으나

C 하인은 1 달란트를 더 큰 돈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1 달란트 마져 빼앗겨서 A 하인에게 주게되었고

C 하인 본인은 내쫓김을 당했다.


는 내용인데… 내가 이 이야기를 읽고 생각한 것은… 

이를 통해 큰 돈이든 작은 돈이든 지속적으로 돈을 불리지 않으면 기존에 가진 것 마져 빼앗긴다는

세상의 속성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속성은 2천년 전이든 지금이든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의 욕심이라는게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예상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을까?


그래서 마태효과는 인생의 진리 중 하나를 알려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2023년 6월 15일 목요일

한국 커피계의 역사(쓰리박 중심)

 앞선 글에서 대한민국 반도에 어떻게 커피가 도입되어 확산되어 왔는지에 대해 간단히 정리를 했다.

(http://trmcap.blogspot.com/2023/06/blog-post_15.html)



고종이 마셨던 커피는 드립(Drip) 커피였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며 C레이션에 포함된 인스턴트 커피를 선호하게 된 후

60~70년대 커피 두 스푼, 프림 한 스푼, 설탕 한 스푼의 다방 커피가 트렌드를 잡았고 


80년대부터 대기업을 중심으로 자판기와 대량 생산된 액상 커피가 나오면서

어느 순간 자판기 커피와 캔커피의 천국이 되었다.


90년대부터는 나이스데이, 네스카페 등 커피 전문점 들도 

대기업 중심으로 진입했다가 철수하는 스토리가 있었고

90년대 말에는 아예 스타벅스가 들어오며 현재의 대한민국 커피계가 만들어졌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드립 커피의 한국 역사를 간단히 짚어보고자 한다.


흔히 커피계에는 일(1)서 쓰리(3)박이라고 서씨 한 명과 박씨 세 명의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한다.

한국전쟁이후 인스턴트 커피가 헤게모니를 잡고 있던

이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일본식 커피를 소개한 분들이라고나 할까?

   

     (사실 일제시대에도 드립커피였는데... 한국전쟁으로 명맥이 끊기고

      미군의 전투식량인 C레이션에 포함된 인스턴트 커피를 계기로

      인스턴트 커피를 즐기던 것이 다시 드립커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일 서는 1980년대에 활동했던 서정달 선생이고 


쓰리 박은 과거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와 1990년대 부터

한국의 커피계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세 명인

박원준 선생, 박상홍 선생, 박이추 선생을 지칭한다.



먼저, 서정달 선생(작고)은 1980년대 명동 미도파 백화점(현재 롯데 영플라자 자리)에 있는

커피샵에서 융드립으로 명성이 높았었다.


다만, 이 분은 따로 자신의 블랜딩이나 로스팅, 드립 기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하지 않아

돌아가신 이후 과거와 같은 융드립 커피의 맛을 보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3755449 기사 일부 발췌



박원준(작고), 박상홍(미국 거주), 박이추(강릉 거주)의 세 분 중


박원준 선생은 이화여대 앞에서 '다도원'을 운영하며 고노 드립 등으로 유명했으나

2008년 작고하시며 더 이상 명맥을 찾기는 쉽지 않다.


박상홍 선생은 오사카 출신으로 일본 곳곳의 커피 맛본 후 한국에 왔는데

마도로스 박이라는 별명이 그를 소개하듯

약 6년 간 배를 타고 많은 곳을 여행하며 커피 맛을 보고 연구하였으나

이제는 미국에 정착한 관계로

한국에서 그의 커피 맛을 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2015년 카페 뮤제오(caffemuseo.co.kr)와 인터뷰 당시



박이추 선생은 일본 국적 교포에서 1990년대 한국으로 귀화하신 분으로

도쿄의 '깃샤텐'이라는 학원에서 커피를 배워서 한국으로 왔다고 하는데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시는 분이다.


이 분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을때 훗카이도 지역에서 목장을 운영하는 일을 배우고

한국에 와서 협동 농장 방식을 적용하려다가 목장 땅 소유권 분쟁 등으로 결국 목장일을 포기하고

여행차 갔었던 도쿄에서 우연히 커피를 접하고 그 향에 반해 

깃샤텐이라는 커피 학원에 등록하고 시작한 것이 바로 개인적인 커피 경험의 시작이고


1988년 혜화동 로터리(현재 엘빈 자리)에 가배 보헤미안을 오픈 한 것이 

한국에서의 커피 커리어 시작이다.


    (이때부터 서정달 선생, 박원준 선생, 박상홍 선생, 박이추 선생이 모임을 갖고
     커피에 대한 지식을 나누게 되었는데

     일 서, 쓰리 박이라는 말이 이때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는 90년대 초에 고려대가 있는 안암동에 인터네셔널 보헤미안을 이전 오픈하고

다시 강릉 연곡면에 추가 샵을 오픈하게 되면서 현재의 강릉 커피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아직도 안암동에는 보헤미안이 남아있다.)


    (혜화동에서 안암동으로 옮긴 이유가 당시 데모가 잦고 격렬하여
     최루탄 영향이 너무 많아 영업이 쉽지 않아서인데,

     안암동으로 옮기고 나니 커피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시 2004년 강릉 연곡면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안암동 보헤미안 시절,

그곳을 자주 찾던 교수가 단국대 사회교육원 커피 전문가 과정을 만들겠다고

그에게 상담을 받고 간 것이 2000년 2학기 단국대 천안 캠퍼스에서 지도교수를 하게되고

이 인연으로 단국대 서울 캠퍼스 지도교수,


2003년 부터는 강릉 원주대에서 바리스타 양성 과정을 지도하게 된다.


이제는 과거 일 서, 쓰리 박 중 막내로서(이제 80대 이신데)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강릉 지역에서 커피 나무를 키울 수 있는 보헤미안 매장을 추가 확보하고

서울 지역으로도 추가 매장을 상암동 지역에 오픈하였을 뿐 아니라


2016년 라오스 지역에 커피 농장 약 6,000평을 매입하며 커피 관련 행보를 넓혀가고 있다.

(커피 나무 심은 지 3년 후부터 수확이 가능하다고 하니 아마 20년부터는 여기 커피를 만날 수 있을 듯) 

한국 커피계의 역사(조선 시대 부터 스타벅스까지)

 많은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커피가 처음 소개된 것은

아마 아관파천 기간인 1896년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맛본 내용 으로 알고 있다.

(아관파천은 1896년 2월에서 1897년 2월 기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을 이야기 하는데

 이때 친일 내각이 해체되고 친러 내각이 수립되는 등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붉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아직도 서울 중구 정동에 가면 볼 수 있다.


하지만 아관파천과 관련된 커피의 스토리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종의 날조로서

1886년 당시 조선의 관료였던 윤치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쓴 일기에

'돌아오는 길에 가배관에 가서 두 잔 마시고 서원으로 돌아오다' 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

고종이 최초로 커피 맛을 본 조선인 같은 것은 아니고  


1884년 3월 27일 자 '한성순보(1883년 창간)'에 커피를 언급한 내용이 있고

('이탈리아 정부는 시험 삼아 차와 가배를 시칠리아 섬에 심었다'는 내용)

초대 주한 영국영사를 지냈던 윌리엄 칼스의 저서(Life in Corea, 1888년 출간)에도

'1884년 5월 조선에 부임하면서 숙박 시설이 없어 조선 세관 책임자인 묄렌도르프 집에서 묵었는데

뜨거운 커피가 제공되 고마웠다' 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1880년대 커피는 이미 조선에서 서양 근대화의 상징이었고 새로운 문화를 주도하는 하나의 콘텐츠 였고

당연히 고종은 아관파천 전에 이미 커피를 접해서 즐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커피는 '서양의 검고 쓴 맛이 나는 한약 탕국'이라는 뜻에서 '양탕국(洋汤)'으로 불렸고, 가배차/가비차 이렇게도 불렸는데 이는 중국어 咖啡(KaFei, 한국식 독음은 가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02년에는 서울 정동의 이화여고 자리에 설립되었던 손탁호텔 1층의 정동구락부에

한국 최초의 대중 커피숍이 오픈하였으나 너무 비싼 가격에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었으나

입소문을 타고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 나갔고,



이런 인기에 힘입어 동아 일보에서는 1920년~1930년대에 '카피(커피)의 효력'이나 
'카피(커피)차 끓이는 법' 등의 커피 관련 기사를 내기도 했었다.



1945년 일제 강점기를 벗어났으나 혼란한 시기라 커피 문화의 발달은 쉽지 않았고

1950년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에 들어온

미군의 군용 야전식량 'C레이션'에 포함된 '인스턴트 커피'가 소개되었고


미국의 씨레이션, 식사류 외 설탕/소금 그리고 담배와 껌 등이 함께 들어있고 붉은색으로 표시한 부분에 인스턴트 커피가 있다.


이 인스턴트 커피는 당시 명동 일대에서 성황리에 운영되었던

'마돈나', '모나리자', '플라워' 등에서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커피는 경제 개발의 과정에서 외화 낭비의 주범으로 몰렸지만

오히려 청년 층으로 확산되었고 정부는 외화 반출 통제, 세수 확보 등 목적으로

한국 국적의 커피 업체 설립을 인가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1968년 5월 동서커피가 인천 부평에서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 동서커피가 한국 업체 최초로 인스턴트 커피를 개발하고

    심지어 1976년 12월 세계 최초로 커피믹스를 개발한다)

   - 참고로 동서커피는 Kraft Foods와 (주)동서가 50%/50% 지분으로 설립한 JV


1970년대에는 음악 전문 다방이 유행하며 비싼 커피의 소비처가 되었으나

1980년대 들어 상대적으로 저렴한 자판기 커피가 본격 도입되면서

동서식품과 네슬레 인스턴트 커피 제품이 경쟁을 크게 하였고

이 과정에서 점점 더 커피의 대중 접점이 넓어지며 수요가 확대되었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1990년 1월 대상(과거 업체명 미원)이 '나이스데이'라는 커피전문점 1호를 내면서

기업형 커피전문점이 활성화 되었고

한편으로는 맥스웰/레쓰비/네스카페 등이 캔커피 시장을 확대하였다.



하지만...

1999년 커피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1999년 7월 이화여대 근처에 스타벅스 1호점이 오픈한 것이다.



이 스타벅스의 출현으로 현재의 대한민국 사람 대다수가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되거나

마시지는 않더라도 인지는 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다.






2021년 7월 13일 화요일

영원한 속죄상을 뺀 200억원 대의 기증

 21년 7월에 실제로 발생한 일이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21/nwtoday/article/6284675_34943.html


200억 식물원 기증…'영원한 속죄상'은 빼고

지난해 속칭 '아베 사죄상'으로 화제를 모았던 평창 한국자생식물원의 김창열 원장이 식물원 전체를 산림청에 기증했습니다. 확보한 식물 자원을 나라에서 잘 보전해 달라는 ...

imnews.imbc.com


'아베 사죄상'으로 화제를 모은 평창 한국자생식물원 김창열 원장이 

200억원 상당의 식물원을 대한민국 정부 산림청에 기증하면서,

그 식물원 내부에 있는 '영원한 속죄상'(속칭 '아베 사죄상'으로도 불린다)을 기증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 이유는.... 바로...

국가 소유로 둬서 국가 간 대립의 부담을 지우기 보다는

사적 소유로 두고 민간 영역에서 이를 지속 시키기 위해서...


국가 단위에서 해야할 일과

개인 단위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분간하셔서 결정한 일인 듯 싶다.



2021년 4월 12일 월요일

서울 시장, 부산 시장 보궐 선거 결과의 원인 분석

 이번에 진행된 서울 시장 및 부산 시장 보궐 선거에서

두 곳 모두 국민의힘 정당에서 추천한 오세훈 후보 및 박형준 후보가 당선되었다.

(심지어 압도적 차이로..)


먼저 국민의힘 이라는 정당은 어떤 곳인가?


해당 정당 사이트를 직접 찾아서 정리해 봤다.

www.peoplepowerparty.kr/renewal/about/history.do


국민의힘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힘! 국민의힘

www.peoplepowerparty.kr

그러니까.. 국민의힘 이라는 정당의 전신은

자유한국당 이고

자유한국당 의 전신은 새누리당이었다.


그리고 새누리당 의 전신은 한나라당 이었고

이 한나라당의 전신은 신한국당이었다.



여기까지가 그들 홈페이지에서 명기하고 있는 내용...



그런데, 신한국당이... 원래 민자당 이었고

민자당은 기존에 민정당에서..

민정당의 전신은... 어디인지

조금만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당을 찍어? 그것도 20대, 30대가?

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이라면 

혹시 아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보자.


위의 뉴스가 사실이라면,


말 그대로 선거 참패의 원인은 위와 같은 안이하고 잘못된 상황인식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먼저 그들이 이승만 정권에서 일어났던 내국인 학살 등을 모를까?

그들이 4.19 때 죽은 리라 초등학교 학생을 모를까?

그들이 부마항쟁, 유신 개헌, 박정희 암살, 신군부 쿠데타

그리고 5.18 과 6월 항쟁을 모를까?


그리고 이 모든 피의 희생과 민주주의에 길에 있어서

누가 적이었는지, 당시 그 적들의 후예가 누구인지 모를까?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찍어야 했던 이유를 모를까?


이건 큰 신호이다.

대통령 선거도 아니고 국회의원 선거도 아닌

겨우 시 레벨의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정권 심판론이라는 국민의힘의 캐치프레이즈가 먹히지 않을 것이라고 

너무 편하게 판단한 것은 아닌가?


사실 그동안 더불어민주당이 얼마나 일을 못했길래 

위의 많은 역사적 백그라운드를 이해하고도 그들을 찍었을까?

그만큼 20대, 30대 들은 민주당에 실망하고 있는 것이다.


총선에서 174석(지역구 161석, 비례 13석)을 몰아줬는데...

뭐하나 제대로 정책이 만들어져서 삶을 낫게 만든 것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젠더 이슈를 부각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강화하고

재산세만 급등하고... 집 값만 급등하고...

20대, 30대를 벼락거지화 시켜서 코인에 몰두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물론 나처럼 코인을 하지 않는 30대도 있다)


당연히 더불어민주당은 자기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알고 있다. 

박근혜 정권 시절 풀어놓은 저리 대출 등으로

유동성이 증가해서 자산 가격 상승하는 거 알고 있고

그거 잡으려고 공시지가 움직이다가 이꼴 난거..

근데, 이게 사고 친거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이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면

국회의원 자리 과반수 이상 몰아준 것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심지어 이번에 더불어민주당 초선의원 5명이 반성문이랍시고

포스팅한 내용만 봐도...

상황인식이 얼마나 한심한 수준인지 알 수 있다.


검찰 개혁 등 필요한 부분에 대한 내용에 대해 반성을 한다는 것은

더불어민주당 내부의 누구와 상의한 내용일까?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구분해서 판단해야 할

여당의 국회의원의 수준이 이러한데...

개전의 가능성이 있을까?



서울 시장 자리를 차지한 오세훈 후보가 벌써 아래의 거리두기 완화 추진 같은 삽질을 시작했는데,

(왜 우리나라가 브라질처럼 몇 만명씩 감염되지 않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을 해봤다면...) 


이런게 답답한 것이다. 선거를 잘못해서 다시 시민이 피해를 보게 생겼다.

적절한 조치를 사용하지 않아 서울 시민의 피해가 커지면

이 또한 더불어민주당의 잘못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의 새로운 피라고 할 만한

초선 의원의 상황 인식이 저러한데.. 이건 답이 없는 것 아닌가 싶다.



지금 더불어민주당에게 남은 단 한가지의 길

1. 당의 방향을 명확히 하고

2. 시민의 삶 수준 개선을 눈에 띄는 수준으로 보여줘야 한다.


1번은 전체적인 내부 논의를 통해 젠더 이슈, 상황 인식 부족 등 자질 이슈가 있는 분들을 쇄신하는 것이고

2번은 신속한 법 개정을 1 또는 일시적 2 주택자에 대해 실수요 여부 확인 후 재산세 3년 전 수준으로 완화

기타 과거 대비 증가하는 세금 추적 통한 부담 완화를 하고,

재난 지원금 지급 및 청년 대상 지원 강화(청년 향 지원은 내수 소비 증가로 이어진다) 등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많이 있는데... 이런거 방구석에서 잠깐 생각한 나보다도

 당연히 많은 정책 보좌관이 있는 민주당에서 더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을까?)


앞으로 3개월이 중요한 것 같다.


3개월 내 큰 움직임을 통해서 나 같은 일반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이 분위기는 굳어지고 민주당 내부 단속 조차도 어려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우리나라의 20대, 30대는 멍청하지 않다.

멍청하게 보이는 선택을 할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있고


그들은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강한 집권 여당이 져야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잘하고 있는 정책도 있지만... 항상 공격받는 것은 잘못하는 정책이다.

잘못하는 정책은 시민들의 부담이 늘어나는 정책이고

현재의 LH 등 비리 구조를 개선하지 못하고 젠더 이슈 등으로 특권 층을 만들며

일반 시민의 삶을 개선시키지 못하는 정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