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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8일 목요일

[비서처럼 하라] 조직에 도움되는 사람되기



“운명이 너에게 도달하도록 
허용한 지점이 어디이든 간에 
지금 존재하는 곳에서 완전히 존재하라.”
-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약 10 년전 법학 교수를 하는 선배와 
사회체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당 비서라는 포지션에 대해 
이해 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가장 새롭게 깨달았던 것은 
비서라는 직업이었다. 
그날 이전에 나는 흔히 비서라고 하면 
커피나 차를 준비하고 전화 메모를 남기고 
자동차에서 높은 사람이 타고 내릴때 
문을 미리 열어주고 닫아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서는 보좌관의 역할을 하다가 
때로는 대리인이 되기도 하는 엄청난 위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머리를 한방 맞은 듯했다. 


예를들어 과거의 스탈린이나 후르시초프 같은 
당 비서의 경우는 당이 인격체가 아니므로 
비서가 당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는 
무소불위의 힘을 갖는 수퍼 비서가 되는 것이다.


현대 조직의 비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말 일반 상식 속의 그렇고 그런 비서도 있지만, 
제대로 된 조직에서의 비서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구 소련의 당 비서 정도는 되지 않더라도, 
예전 삼성 그룹의 구조조정본부 같은 비서조직을 보면 
얼마나 큰 힘을 가진 집단인지 알 수 있고 


그 조직에 속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충분히 상상이 간다. 


그렇기 때문에, 비서처럼 한다는 것은 
바로 CEO 처럼 한다는 것과 큰 차이가 없으며, 
조직에 정말 필요한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비서처럼 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나는 여기에 대해서 추천할 만한 책이 있다. 


과거 강원도 정무 부지사를 지내고 
이번에 대한석탄공사의 사장으로 취임한 
조관일 씨가 쓴 “비서처럼 하라”를 보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따르면 비서의 방식 10가지가 나온다.

1. 멀티 플레이어
2. 재능보다는 충성심
3. 상사 관리
4. 부지런함
5. 보스의 시야를 획득
6. 상사에게 고급정보 제공
7. 비서만의 대화법 획득
8. 비서 같은 매너
9. 비서처럼 자신의 성질 다스리기
10. 비서같은 인맥관리



이 책의 목차에 있는 내용을 옮겨보니, 
짧은 글의 한계로 인해 일견 오해를 살 부분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 전체를 통틀어서 
강조하는 것은 딱 한가지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조직에서 성공하는 단하나의 방식은 
“부지런히 마음을 다해 고객을 섬기고 
자기를 관리하는 방식”이다.

만약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2019년 7월 16일 화요일

[고민하는 힘] '자유'라는 '인식의 열매'를 먹어버린 인간을 위한 책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의 저작들을 통해 
정체성과 자아에 대한 질문 등
아래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해나가는 책.


혼자서 아래의 질문들을 고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움이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대해 느낀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물질적 풍요와 정보의 증가에 따라 
‘자유'라는 ‘인식의 열매’를 먹어버린 인간이 
과거 공동체의 (미신적) 사고 틀을 
벗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끝까지 고민하여 자신의 프레임을 만들고 
거기에 스스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설프게 고민하다 
  나이를 먹어 휘둘리며 분별없는 노인이 되고 
  다가오는 모든 외부 영향에 강한 영향을 받게됨)


음.. 그러고 보니.. 나는 누구이지?.. 
그런데, 나는 늘 뻔뻔했었다.. 
 So.. Cool ^^


아래는 각 목차별 질문과 거기에 대한 내가 느낀 정리..
(그냥 내가 느낀 것을 적은 것이기 때문에 참고만 하고 
 스스로 고민하고 싶으면 책을 읽으면 좋을듯..)


나는 누구인가?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 인정’의 산물
      --> 자기를 타자에게 던지지 않으면 
            인정하거나 받을 수 없다.
            일방적인 자아라는 것은 없다.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돈이 세계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세상의 모든 가치가 ‘변화’해도 ‘돈’만은 
     ‘불변’의 가치를 지닌 일종의 기호이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식과 지성은 다른 것이다.
     모든 프로세스를 안다고 해서 
     그닥 삶에 도움되지 않을 수도 있다.
     현대 문명은 완전한 인간을 
     매일매일 불구자로 망가뜨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 나쓰메 소세키


청춘은 아름다운가?
     청춘은 나이가 아니다.
     아직 완숙하지 않아 어른이라면 
     덤비지 않았을 답없는 주제에 도전하는 것이 청춘?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종교는 제도이다. ‘개인이 믿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믿는 것’이다.
     종교를 기준으로 삼으면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에 하나하나 의문을 느끼거나
     스스로의 의미를 찾아내야 할 필요가 없어진다.
     (예를 들어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불행할까? 왜 병에 걸렸을까? 
      왜 사람을 존중해야 할까?
      왜 일을 해야 할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등등..)

     
     이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보호막에 의해 
     보호를 받고 영양분을 받으며 살아가는 태아와 비슷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내 인생은 도대체 무엇일까’와 같은
     허기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뭔가 실컷 먹었다’는 정도의
     만족감을 느끼며 일생을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인식의 나무 열매’를 먹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이런 것들을 편하게 믿을 수가 없다.
     궁극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믿는다’가
     아니라 ‘자기를 믿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인 종교' 


     스스로 이것이라고 확실할 수 있는 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고민하는 수밖엔 없다.
     —>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위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일을 한다’는 행위는 
     ‘사회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다’는 것과 같다.
     
     직장을 얻거나 일을 시작하면 ‘사회에 나온다’고 
     말하고 ‘사회인’이라고 부른다.
     —> 다른 말로 ‘제 구실을 한다’는 의미이다
            사회 속의 관계도 ‘상호 인정’... 
            조금 바꿔 ‘배려(위로의 눈길)’ 라는 표현 관계가 된다.
    
     자기 존재를 확인 받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한다.
     내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서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사랑은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결과
     개인과 개인 사이에 전개되는 
     ‘끊임없는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에 
     한쪽이 행동을 취하고
     
     상대가 거기에 응하려고 할 때 
     그 순간마다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며, 
     그런 의지가 있는 한 사랑은 계속된다.
     만약 상대가 던지는 물음에 대응할 의지가 
     사라지게 되면 사랑은 끝이 난다.
     
     애정의 온도가 떨어지더라도 
     사랑의 모습이 바뀐 것일뿐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타고 남은 재 속에 남아있는 불씨도 사랑이다.
     행복해지려는 것이 사랑의 목적은 아니다.


왜 죽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살아가는 일에 의미를 확신하지 않으면 절망에 빠진다.
     어떤 부조리한 원인에 의해 
     세상을 이해할 수 없으면 살아가는 일에 대한 
     의미를 확신하지 못한다. 

     자살율이 늘어가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이 무의미하면 삶도 무의미하다.
      -- 삶을 의미있게 하면 죽음 또한 의미가 생긴다.
 
     우리 시대는 인식의 열매를 먹어버렸다
      -- 자유라는 의식을 알아버렸다. 

     자유 라는 의식이 끝까지 발전하면 
     죽는 것도 자유,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유가 이렇게 발전해 버리면 사람은
      ‘의지할 곳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자유를 알아버린 댓가로 
     우리는 스스로 살아갈 힘을 만들어야만 한다.
     상호 인정을 해줄 관계를 계속해서 
     찾아야 만 하는 이유이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확신할 수 있게 되면 마음이 열린다. 
     자기의 의미를 확신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
     따라서 고민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확신할 때까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 


늙어서 ‘최강’이 되라
     지금은 분별없는 노인들의 시대이다.
     스스로 고민하지 않았던 젊음이 나이만 먹어버린 것이다.
     끝까지 고민해서 뻔뻔해 져야 한다.
     과거에 사람들은 ‘저 세상에 가면 
     고통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며 

     죽음을 자기들이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제 죽음은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허무하다는 것이 아니다.
     ‘각오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 이라는 뜻이다.